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유럽마저 재정위기에 처하자 다시 자본주의 모델의 논쟁이 시작됐다. 유치산업 육성, 적대적 인수합병, 복지 확대에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영미식 자본주의 대신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노동 복지를 내세우는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영미식 모델이 강조하는 민간 부문의 역할, 소유권 분산, 재산권 보호, 시장 경쟁의 투명성과 공정성 같은 자유주의의 가치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다. 국가 권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민간 부문과 시장을 확대하고 국가를 축소해야 한다. 혹자는 한국이 IMF 위기 직후 금융 자본주의와 주주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했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그 원인은 영미식 모델 자체 보다는 신모델 수용을 위한 준비성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
개도국과 선진국 모두에게 영미식 자본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이미 15년 전 영미식 모델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이 독일-북유럽식으로 경로를 다시 바꾸고 현 제도를 개편할 경우, 그에 따른 이득보다는 치러야 할 비용이 훨씬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국가가 시장질서를 유지하고 공공복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본주의 모델을 선택하느냐에 앞서 어떻게 정부의 집행력과 정책 수행 역량을 높여 세계화의 압력 하에서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 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는 조세저항 없이 증세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다양한 자본주의 모델
자본주의 모델은 크게 영미식, 독일-북유럽식, 프랑스-일본식으로 나뉘지만 현실에서 신흥 발전국과 개도국 대부분은 이 세가지 모델의 혼합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사적 자본의 분산 소유구조가 특징이다. 자유주의에 기반하여 국가 영역의 축소를 강조하는 영미식 모델은 자본 시장과 기업의 활동을 장려하고 강조한다. 영미식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는 대체로 첨단기술과 서비스 분야를 비교우위로 삼고 있다. 또한 경쟁적인 산업 관계 하의 기업과 노동은 다양한 부문 에서 자유롭게 복수의 이익집단을 설립할 수 있다. 이들 단체는 국가로부터 승인이나 보조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각 부문에서 독점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한편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에서도 사적 자본이 지배적이지만 소수 자본이 시장을 집중 점유하는 과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미식 모델과 달리 공동체 내 협약을 강조하는 독일-북유럽식 모델에서 국가는 적극적인 행위자이다. 독일-북유럽 국가는 제조업 비교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업과 노동은 부문 별 전국 단일 조직을 구성하기 때문에 조직의 권위와 내부 위계질서가 뚜렷 하다. 또한 이들 집단은 국가에게 지도자 선출 과정과 조직 활동에 대한 규제를 허락하는 대가로 법적, 제도적 독점권을 보장받고 정책 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반면 프랑스-일본식 자본주의는 공적 소유 자본을 일정 부분 허용한다. 국가의 시장 개입을 용인하는 프랑스-일본식 모델에서 금융 자본의 소유권이 민간 부문에게 있다 하더라도 정부가 자본의 배분 관리에 일정한 수준에서 개입한다.
현실의 국가 대부분은 이들 세 가지 모델이 혼합되어 있는 자본주의 구조를 갖고 있다. 싱가포르나 이스라엘에서 나타나는 기업적 국가 자본주의는 영미식과 독일-북유럽식의 혼합 양식이며 인도와 브라질의 민주적 발전 자본주의는 영미식과 프랑스-일본식의 절충적 형태이다. 한국과 대만의 발전 국가 모델 역시 국가와 기업의 협력이 만들어낸 국가주도 경제라는 점에서 영미식과 프랑스-일본 식의 혼합 모델이다. 2000년 대 말 시작된 미국과 유럽의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 전 세계의 3/4을 차지하는 개도국이 앞으로 어떤 모델을 확장,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선거를 앞두고 복지 논쟁이 불거지면서 자본주의 모델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나쁜 선택?
영국 캠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서 독일-북유럽식 모델을 제시했다. 영미식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에 빠른 개발과 복지에 취약하며 따라서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북유럽식 모델의 지지자들은 무엇보다도 개도국이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과 산업 정책에서 정부의 개입을 강화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선진국이 개도국의 따라잡기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사다리 걷어차기’ 전략을 펼치고 있지만 개도국은 보호관세 부과, 보조금 지급, 외국인 투자 규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개도국에서 국가는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의 핵심이며 이 같은 거대 국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이익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국가의 출범 이후 헤게모니 계층이 형성되지 않은 미숙한 다원주의 하에서 개발과 근대화라는 목표 하에 국가의 영역은 더욱 비대해졌다. 이렇듯 국가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권위주의 개도국에서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개도국에서 저발전의 원인은 시장이 아닌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IMF가 분류한 140여 개도국 가운데 110여 국가가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 기준의 ‘부분적으로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은’ 비민주주의 국가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걸림돌은 언제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비판보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경쟁적 시장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압도적이다.
따라서 개도국에게 필요한 것이야말로 영미식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국가 영역의 축소와 민간 부문의 확대이며 자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작은 정부, 법과 질서 준수, 다원주의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 공여국에서 대외원조를 실시할 때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비민주주의 수원국에 대한 원조는 해당국 시민의 공공복리가 아닌 현존 권위주의 정권을 공고화하는데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치 못하게 원조를 해야 할 경우, 독재 정권의 승리 연합(winning coalition)의 크기가 큰 나라, 즉 독재자 측근의 지배 엘리트 숫자가 많은 나라를 택하는 것이 그나마 원조자금이 시민의 후생복지를 위해 쓰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지지 엘리트의 수가 많을 경우 내부 경쟁이 높아짐에 따라 충성심의 강도가 낮아지며 이는 독재자에게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위주의 개도국이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처럼 이제 막 민주주의를 시작한 나라가 독일- 북유럽식 자본주의를 도입하면 어떻게 될까? 과연 장하준 교수의 말처럼 제조업을 발전시켜 선진국을 따라잡고 국민에게 일정한 생활수준과 안정을 제공해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나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를 이식한다면, 국가는 아래로부터의 이익집단 결성의 요구를 즉각 탄압하거나 회유, 포섭할 것이며 그나마 존재하던 초보적 다원주의는 급격히 쇠퇴 할 것이다. 기업이나 노동 세력이 여전히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생 민주주의의 경우, 예측과 전망이 어려운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에 놓여있기 때문에, 오히려 권위주의로의 회귀가 일어날 수 있다. 독일-북유럽식 모델은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하에서 협조적 산업관계와 공고화 된 다원주의가 맞물리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이익집단이 자율성을 갖고 자발적으로 국가와 협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가의 높은 정당성과 재정 확보는 필수적이다.
투기자본의 확산은 영미식 자본주의 탓이 아니다
장하준 교수와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한국의 자본주의 모델 역시 독일-북유럽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금융 자본주의와 주주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근거이다. 더 나아가 현재의 정보 공개와 투명성 강화의 정책 정도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중앙은행을 직접 관리하는 관치금융의 도입마저 적극 권한다. 이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시중 은행을 관리 감독하는 독일-북유럽식 모델보다 정부의 영역을 더욱 확대 강조하는 처방이다.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게만 맡긴 결과가 영미식 모델의 최대 약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안고 있다.
첫째, 금융 자본주의는 영미식 보다는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와 더욱 친화적이다. 금융 자본주의는 소수의 은행 자본이 산업 자본과 국민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체제이다. 금융 자본이 주주가치의 증가를 위해 인수합병 시장에 개입하면서 실물 경제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영미식이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라면 독일-북유럽식 모델이야말로 은행 중심의 자본 주의이다. 독일의 과점 모델은 백화점식 은행 구조를 바탕으로 금융과 증권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데 금융 자본이 희박했던 독일제국에서 매우 필요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북유럽식 금융 시스템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산업 부문에 국내외 자본을 배분한다. 이러한 독일-북유럽식 구조에서 은행은 정부와 기업을 잇는 중개인으로서 국가-민간 부문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국내와 해외 자본을 연결하여 투자를 유치하기도 한다.
둘째, 한국 기업이 인수합병에 취약해졌다면 이는 주주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며 단기 외국자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만한 제도나 부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광범위하게 분산된 소유 구조를 갖고 있으며 모든 주식시장 참여자에게 동등하고 투명한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 독일-북유럽식 모델은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안정적인 소유 구조가 특징이며 소액주주들은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없다. 1990년대 말 한국은 영미식 자본주의를 급히 도입하여 기업 내 지배주주가 없도록 주식 소유를 분산시켰고 사외 이사제를 통해 소액주주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결국 KT&G와 KT을 민영화시켜 적대적 인수합병에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업에게 경영권 방어를 위한 지배주주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배주주의 개인 이익 추구를 미연에 방지하고 소액주주의 가치와 투명 경영을 강조하는 영미식 모델 때문에 세계화 과정에서 단기 차액거래를 노리는 투기자본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IMF 위기 이후 한국에서 영미식 모델은 충분히 뿌리내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북유럽식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이 모델이 보편적 복지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증세를 해야 하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극빈자만 혜택을 받는 게 아니라 모든 시민이 혜택을 받는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당연히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독일-북유럽식 모델에서 볼 수 있듯이, 정당성과 재정을 확보한 국가는 노동, 기업, 정부 간의 협의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각 이익집단이 상호 타협을 통해 이해관계를 실현하도록 이끈다. 무엇보다 기업은 새로운 산업 투자, 노동권 보장, 부자 증세와 같은 이슈에 대해 국가가 요구하는 바를 받아들이고 국가는 그 대가로 기업의 경영권을 안정시켜 준다는 것이다. 만약 조직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독일-북유럽식 모델의 특징인 위계적 질서 하에서 강제력을 통해 최종 협상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협약과 타협을 이끌어내는 법과 제도 건설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증세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요구된다. 징수력은 국가 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조세 저항 없이 세금을 올리는 것은 국가가 사회 깊숙이 침투하여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받음과 동시에, 사회 부유층과 정치인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질 때 가능하다.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싶지만 기존의 세금 관련법을 개혁하고 집행할 능력이 없는 국가도 부지기수다. 징수력은 국가 영역의 크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 집행력과 정책 수행 능력을 포함하는 관료의 역량과 제도화 수준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독일-북유럽식 모델의 높은 세액은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큰’ 국가로서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이에 앞서 국가가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사회의 저항 없이 한국의 25% 수준의 GDP 대비 세금 비율을 북유럽의 45% 이상 수준으로 높이며 10% 미만의 GDP 대비 복지 예산을 30% 이상으로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대적인 증세는 누군가의 결단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이 아닌 정부 능력의 강화
198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은 큰 국가가 아닌 뛰어난 국가 역량, 즉 유능하고 독립적인 경제 관료, 관료 능력에 따른 인센티브 제공, 그로 인한 능력 성장의 선순환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 말 한국의 IMF 위기 역시 작은 국가 때문이 아니라 변화한 질서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와 행정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012년도 한국이 독일-북유럽식 모델로 경로를 전환하면서 드는 비용은 오히려 새로운 모델이 주는 혜택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이미 1960년대 거쉔크론과 1970년대 슈미터가 주창했던 독일-북유럽식 모델이 왜 2010년대 한국에서 다시금 논의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나라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은 모델의 유형이나 국가의 크기가 아닌 국가의 능력이다.